사는이야기/길이야기

충장공 한백록과 장절공 신숭겸

들연 2015. 3. 10. 22:26

 

충장공 한백록 장군

 

충장공 한백록(15551592)의 묘역과 정려각은

춘천시 서면 금산리 산 64, 방동리 4062에 소재하고 있으며

도 문화재 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서 태어난 청주인으로 1580년 알성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원균, 이순신장균과 함께 옥포해전, 합포해전에 참여해서 승리로 이끈 후

부산첨사에 올랐으나 15927월 미조항전투에서 전사 하자 노비 득충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했다고 한다.

 

한백록은 본관이 청주로 서면 당산리(현 방동리) 출신의 순수 춘천사람으로

수군이 된 특이한 사례의 인물이다

선조 임금 때인 26(1581)에 알성무과(謁聖武科)에 급제했는데

 

당시 시대상황을 보면 북쪽 변경에서는 오랑캐들이 넘나들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남쪽 바닷가 마을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던 시기였다.

더욱이 나라 안 에서는 붕당정치의 폐해로 국가의 기반자체가 흔들리던 때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태어난 한백록은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무인의 길을 택했고,

또한 알성무과에 응시해 급제했다.

 

6품직인 진잠현감으로 배수 받고 임지에서 잠업과 병기를 수리보완하면서

군졸훈련을 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다시 남쪽 지방의 요충지인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

제수 받았다.

 

지세포는 거제도 동남쪽에 있으며 경상우수사 관할인 제포진에 속한 만호다.

당시 경상우수사는 원균이었다. 한백록은 임지에 이르자마자 왜란에 대비해

병사들의 훈련과 무기제조 등 전쟁 준비에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선조 25(1952) 임진년 4월 왜적은 대마도로부터 곧바로 부산과 동래 등 요충지역으로 침입,

박홍의 경상좌수사는 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궤멸되었고

또한 경상우수사도 대비책을 세우지 못한 채 무너졌다.

 

15925월 전라좌수군은 옥포에서 일본수군과 최초의 해전이 벌어졌는데

이날 40여척의 적선을 대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원균은 한백록의 전과를 조정에 알려 공을 인정받아,

전사한 정발장군의 후임으로 부산첨사에 특별 제수되었다.

 

이 후 전쟁이 더욱 치열하여 선조 25(1592) 717일 남해 동남쪽 끝에 위치한

미조항 싸움에서 공이 전사하였으니 충장공(忠壯公)의 나이 겨우 38세였다.

 

'선조실록' 258월 신해조에서는 "만호 한백록의 전후의 공이 가장 많았는데,

장군이 적에 탄환을 맞고도 전진하여 싸우다가 전투가 끝난 후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 후에 장군의 노비인 득충(得忠)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인 춘천군 서면 금산3리 관음동으로 반장(返葬)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여지도서''강원도 춘천현 인물조'에 유일한 충신으로 정표(旌表)된다.

 

장군에게는 선조 38(1605) 선무원종공신이등으로 책록되었고,

영조 27(1751)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순조 8(1808) 자헌대부병조판서에 증작되었다.

 

그리고 순조 11(1811) 619일에 '증 병조판서 한백록에게는 충장(忠壯)으로

증시(贈諡)하였다''순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배위(配位) 창녕 성()씨에게는 정부인이라는 가자(加資)가 내렸다.

 

아들은 우천으로 선조 41(1608)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 도사를 지냈다.

이로 볼 때 한백록 장군은 임진년 이래 춘천에서 중요한 충신으로 추모받았음을 알 수 있다.

 

충장공 한백록에 관해서는 아직도 충장공의 업적이 저평가 되어있다고 보는데

수군으로 임진왜란이라는 왜적과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춘천인을

정작 춘천에서는 그리 많은 사람들이 알지를 못하는 현실이다.

 

 

 

 

 

한백록 장군 묘역

 

화악지맥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충장공의 묘역은

밑에서 보면 묘지가 위쪽에 들려있는 듯이 보인다.

 

이는 유혈중에서도 현유혈(懸乳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인데,

이곳은 현유혈이 아니기 때문에 높게 들려 있는 듯한 모습은 안정처(安定處)를 찾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정문

 

의 묘소는 서면 금산리 관음동 골짜기 낮은 구릉에 있고, 정문은 서면 방동리에 위치한다.

방동리 마을회관을 지나 서면 금산리산 64에 충장공 한백록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있다.

 

우리 역사에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모두 13명이다.

 

 

 

 

 

 

장절공 신숭겸 장군묘역

 

신숭겸묘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있으며 장절공 신숭겸 묘역, 신숭겸 장군 묘역이라고도 한다.

묘역은 영정각,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신숭겸(申崇謙) 장군은 평산 신씨 시조로 시호는 장절공(壯節公), 고려 개국 일등공신이다.

고려 태조 때의 무장으로 평산 신씨의 시조이고 처명은 능산이다.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 용산재가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신숭겸 장군이 왕건과 평주(지금의 황해도 평산) 땅으로 사냥 나갔을 때

하늘에 기러기 세 마리가 맴돌았다. "누가 저 기러기를 쏘겠는가" 묻자

신숭겸이 자청하여 왕건이 지목한 세 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혀 떨어뜨렸다.

태조가 탄복하며 평산을 관향(貫鄕·성씨의 고향)으로 삼게 했다.

임금이 내려준 사성(賜姓)이다. 진짜 성씨가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신숭겸은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궁예의 태봉(후고구려)에 이어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918)한 공신이다.

 

후삼국 시대는 견훤, 궁예, 왕건의 세력이 비슷하여 우리 역사에서 유일한 전국시대다.

서기 927년 태조 왕건과 함께 팔공산 전투에 출정한 신숭겸이 후백제 견훤군에 포위돼

몰사 위기를 맞게 됐다. 신장군이 왕건으로 변장하여 싸우다 참패했다.

 

견훤은 그의 목을 자르고 몸만 고려에 보냈다.

왕건이 통곡하며 황금으로 머리를 대신 만들어 현 위치에 장사 지냈다.

 

이곳은 처음에는 도선대사가 태조 왕건이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정한 곳인데,

우리나라 8대 명당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라고들 한다.

 

이 묘는 도굴을 염려해 시신은 하나인데 봉분은 세 개인 13분의 특이한 묘역을 조성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어느 묘 안에 안장돼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설에는 부인 묘를 합장했다는 얘기가 전해오나 문중에서는 중앙의 봉분 앞에서 제향을 모시고 있다.

 

태조는 팔관회 때 신숭겸과 김낙 등의 전사한 공신들을 생각하고 가상을 만들어 열석시키고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이것은 그후에도 전승되었는데, 예종이 팔관회에서 이를 보고

두 장수의 후손을 불러 시를 지어 내리고 충절을 기리는 노래 '도이장가'를 지었다.

 

1805(순조 5)에 세운 신장절공 신도비는 당시의 세도가 영안부원군 김조순이 짓고,

··화의 삼절로 이름난 자하 신위가 썼다.

 

신숭겸 장군의 동상은 3개가 있는데 그의 출생지인 곡성 용산재,

전사한 곳인 대구광역시 지묘동 인근 파군재 삼거리,

강원 춘천 신숭겸 장군 묘역에 각 1개씩 있다

 

신숭겸장군의 영정은 대구 대비사에 봉안해 오다가 불타 버렸으며

1975년 운보 김기창 화백에게 휘호를 위탁 하여 제작하였다

 

조선 8대 명당

남양주시 안동김씨 김번묘, 의왕시 안동권씨묘, 파주시 파평윤씨 윤관묘,

춘천시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묘, 청원군 청주한씨 한란묘, 예산군 남연군묘,

예천군 동래정씨 정사묘,부 산진구 동래정씨 시조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