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개발지’ 강원으로 외지 태양광 업체 밀려온다
외지 업체, 땅 사들여 태양광 시설 분양
은퇴 후 안정적 수입 기대한 투자자 유입
느슨한 허가 기준에 새로운 투자처 각광
/ms투데이
안전 문제 우려하는 지역 주민 반발 커 산악지대가 많은 강원지역은 개발이 어려워 그동안 태양광 시설의 설치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하지만 수년 전 태양광 발전이 먼저 시작된 전라, 경상 등 남부 지방이 임계점까지 다다르자, 태양광 업계는 신규 개척지를 찾아 강원지역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자체의 느슨한 규제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외지 태양광 투자자들이 ‘최후의 개발지’를 찾고 있다. 규제의 고삐를 늦춘다면, 천혜의 자연을 기반으로 관광 산업이 발달한 강원은 경쟁력을 잃고 태양광 패널로 뒤덮이는 암울한 날이 올 수도 있다.
▶‘외지인 투기’ 전락한 태양광 발전
주민 300여명이 사는 평창 봉평면 평촌리 마을에는 60곳의 태양광 발전소가 운영 중이다.
이 중 100㎾짜리 발전소 9개는 경북 포항의 한 업체가 2020년 7854㎡ 규모의 밭을 사들여 7개로 쪼갠 뒤,
‘잡종지’로 지목을 변경해 개발에 나선 결과물이다.
부산의 한 분양 업체에서 자기 돈 5000만원만 있으면 대출을 끼고
1억9000만원짜리 태양광 단지를 분양받을 수 있다고 광고했다.
인천, 경기 평택, 전북 익산 등에서 투자자들이 시설을 사들였다.
이 야산 인근에는 총 설비 용량 3666㎾ 규모의 또 다른 태양광 발전 시설 14개가 가동 중이다.
원주 소초면 교항리도 250여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2021년에 100㎾ 발전소 29개가 들어섰다.
전북 전주에 있는 업체가 발전소당 2억3000만원에 분양했다.
이 업체는 자기 자본 8000만원에 1억5000만원 대출로, 사업 4년차부터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홍보했다.
원주와 횡성 등 인근 지역은 물론 서울, 경기 안양, 충남 공주,
전남 광양‧목포‧나주 등의 외부 투자자들이 운영하고 있다.
강원지역 시군별 태양광 발전소 현황. (그래픽=박지영 기자)
청정 자연을 자랑하던 강원도에 외지 태양광 업체와 투자자들이 몰리고 있다.
태양광 발전소 포화상태인 전북(3만3739개), 경북(2만4404개), 전남(2만4096개),
충남(2만1279개) 등과 비교해 강원도는 다른 지역보다 아직 태양광 패널을 설치할 산지가 많이 남았다.
더욱이 땅값이 싸고 느슨한 태양광 발전소 설치 기준으로 규제가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을 훼손하고 마을의 경관을 해치며 산사태 등 안전 문제를 외면한 채,
외지 투기꾼이 마구 몰려 강원도 자연에서 경제적 과실만 따가고 있는 셈이다.
특히 강원도에서 지금껏 태양광 전기 사업 허가를 받은 건수는 1만2488건이다.
이중 현재 태양광발전을 하고 있는 곳은 67.8%(8462건)으로,
허가를 받은 셋 중 하나는 앞으로 언제든지 태양광 발전소를 새로 지을 수 있다.
강원도내 시군에서 태양광 발전소는 다른 어떤 개인 사업자 업종보다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인제 860개, 철원 767개, 양구 760개, 고성 681개, 화천 513개다.
설악산을 끼고 있어 환경 규제가 심한 속초(76개)와 양양(96개)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은 확대일로다.
이런 태양광 신천지로 강원도가 대두된 가장 큰 이유는 느슨한 태양광 설치 기준 때문이다.
춘천은 도로 및 주택에서 100m의 거리를 두면 된다.
화천, 철원 등은 500m 이상 거리를 두도록 한 것과 달리 태양광 발전 허가를 받기 쉽다는 의미다.
춘천 사북면 오탄리의 이 태양광 발전소는 전북 고창에 주소를 둔 업체 소유다.
인근 주택과 농장이 있지만 느슨한 이격거리 규제를 활용해 태양광 시설이 설치됐고,
이후 주민들이 농사에 차질이 생겼다며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사진=박지영 기자)
낮은 장벽을 틈타 춘천에도 태양광 시설이 확대되고 있다.
2022년 춘천 사북면 오탄리에 들어선 936㎾의 대형 태양광 발전소는 전북 고창 업체의 소유다.
이곳은 기존엔 밭으로 쓰였지만, 인근 농장과 시골길 하나를 사이에 둔 땅에 발전소가 설치됐다.
인근 주민은 “태양광 시설이 가까이 있으면 빛의 영향을 받아 주변 작물이 잘 안 자란다”며
“한동안 외지 업체에서 동네 주민들에게도 땅을 임대하라고 나섰지만,
주민들의 거부감이 심했다”고 밝혔다.
춘천 동산면의 한 주민도 “2018년부터 100m 거리를 두는 조례가 생기면서
태양광 시설이 민가와 너무 가까워졌다.
누가, 왜, 무엇을 위해 그렇게 조례를 만들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홍천은 10가구 이상 인가가 있는 지역으로부터 직선거리 500m 내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했다가 작년에 돌연 200m로 규정을 바꾸었다.
태양광 발전소가 1355개로 도내에서 가장 많이 설치되어 있는데도,
규정을 바꿔 더 많은 시설을 세우도록 문을 활짝 열었다.
더욱이 우량 농지로 보존할 필요가 있는 지역은 태양광 시설 설치가 불가능했지만,
2022년에 5년 이상 군에 주소를 두고 건축물의 용도에 적합하게
목적사업을 영위한 농업인에게는 발전 시설을 허가해 주는 내용의 조례를 만들었다.
이런 예외 조항을 틈타 업체들의 편법 쪼개기 투기가 확산하고 있다.
올해 2월 홍천 남면이장협의회가 이런 허술한 조례를 개정하라고 나설 정도였다.
또 지난해 영귀미면 월운리 일대에선 태양광 발전소 건립을 두고
주민 반발이 잇따르자 사업이 철회됐다.
남면 시동1리에서는 불법으로 사들인 농지에
태양광 발전소 설치를 하려한다고 주민들이 항의하기도 했다.
강원지역 각 시군이 조례로 규정하고 있는 태양광 발전 시설 설치 기준. (그래픽=박지영 기자)
강원지역에서 두 번째로 많은 태양광 발전소를 가진 원주(1191개)는
아예 2018년 조례를 신설할 때부터 태양광 설치 규제가 허술했다.
도로에서 200m, 주택 경계로부터 200m를 넘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원주는 시 지역임에도 도내 시‧군 중 태양광 발전량에서 4위를 차지할 정도가 됐다.
이같은 마구잡이식 태양광 발전소 설치에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다.
횡성 안흥면 송한리 일대 8만8161㎡ 부지에 4개 업체가
1만499㎾ 규모의 태양광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축구장 13개를 만들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
결국 지난달 안흥면 이장협의회 이장 전원은
태양광 발전 단지 추진 반대 서명부를 만들어 단체행동에 나섰다.
▶돈 되는 태양광, ‘규제 완화’ 불붙인 환경단체
태양광 설치 규제가 의외로 쉽지만은 않다.
환경단체들은 지역주민들의 의견과 달리 범세계적인 기후변화 대처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솔루션 등 환경단체 5곳은
태양광 이격거리 규제가 위헌이라며 지난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업자의 직업 자유와 평등권, 시민들의 환경권과 행복추구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했다.
철조망을 세우고 출입을 차단한 춘천의 한 태양광 발전 시설.
이 땅은 태양광 패널이 설치되기 전까지 밭으로 쓰이던 곳이었다. (사진=이정욱 기자)
이런 규제 완화 요구 목소리는 대체 에너지 개발에 따른 ‘밥그릇 싸움’ 때문이라는 시선도 잇따른다.
글로벌 기업들이 2050년까지 사용하는 전력량의 100%를
재생에너지(Renewable Electricity)로 전환한다는 ‘RE100’에 동참하면서
신재생에너지를 통해 전기를 생산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인증서인
REC(Renewable Energy Certificates)를 구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REC 수요가 많아지면서 인증서를 판매하는 태양광 발전 사업자들의 수익성이 커졌다.
그래서 민간 사업자들이 싼 토지를 찾아 경쟁적으로 태양광 시설 짓기에 나서고 있다.
농민들에게는 임대수입을 약속하고, 은퇴를 앞둔 투자자들을 향해
‘고수익 태양광 연금’을 기대하라며 손짓한다.
전문가들은 “태양광 산업이 ‘에너지의 자립’ 이란 당초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하종 기후행동청년네트워크 오늘 잇다 대표는 “민간 사업자의 무분별한 개발 대신,
공공이 주도하거나 마을‧지역 단위 협동조합 형태로 발전 시설을 운영하는 대안적인 방법도 있다”고 했다.
마을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경관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주민들이 자기 결정권을 갖고 태양광 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