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나 소나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흔할 뿐만 아니라 국민의 70%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꼽을 만큼 친숙하다. 대부분 나무들은 겨울이면 초록옷을 벗어버린다. 하지만 소나무는 대지가 꽁꽁 얼고 눈보라 치는 추위에도 늘 푸름을 잃지 않는다. 한결같고 변치 않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공자도 세한송백’(歲寒松柏)이라 하여 소나무의 지조를 높이 샀다.

 

국내의 대표적 소나무 숲으로 경북 울진군 소광리 금강소나무 숲과 충남 안면도 자연휴양림을 꼽을 수 있다. 굳이 명소가 아니어도 좋다. 등산길이나 동네공원 어디에서나 소나무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눈 오는 날 서울에서 설송(雪松)을 보고 싶다면 창경궁 명정전으로 가보시길. 아담한 소나무 숲의 운치를 만끽할 수 있다.

 

우리와 소나무의 인연은 꽤나 오래됐다. 3000~4000년 전 선조들이 한반도 안으로 이동해 오면서부터다. 그런데 우리의 숲은 원래 참나무를 중심으로 활엽수로 이루어져 있었다. 울창한 숲을 개간하면서 크고 작은 빈터가 생기자 소나무가 점점 세력을 넓혀 갔다. 햇빛을 많이 받아야만 살아남는 것이 소나무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나 그 이전의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나무를 분석해보면 소나무의 비율이 4~6%에 불과하다. 천마총을 비롯한 임금님의 관재(棺材)로 느티나무나 참나무가 주로 쓰였다. 무늬가 아름답고 단단하며, 잘 썩지 않아서 소나무보다 선호도가 훨씬 높았다.

 

많이 쓰다 보니 이들 자원도 고갈되기 마련이다. 조선왕조가 건국될 즈음 주변 산에서 쓸 만한 나무는 소나무밖에 남지 않았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서 궁궐은 물론 관청이나 양반 집을 짓는 재료로 소나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배를 만들 때도 소나무가 있어야만 했다. 조선왕조는 소나무 보호에 안간힘을 썼다. 벌채 금지령을 내렸고 봉산(封山)’이라는 소나무 특별 보호구역까지 만들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산은 광복 후까지도 헐벗은 채 남아 있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모자랐고 백성들은 소나무에서 얻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땔감은 물론이고 흉년에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버텨야 했기 때문이다.

 

사대부에게 소나무는 선비의 꼿꼿한 기상을 상징했다. 척박한 땅에서 바위 틈까지 가리지 않으며 추위도 이겨내는 강인한 생명력 덕분이다. 송죽매(松竹梅)의 첫머리에 소나무가 들어갔고 수많은 그림에도 소나무는 빠지지 않았다.

 

식물학적으로 소나무는 종류가 여럿이다. 바닷가에는 해송이란 억센 소나무가 자라며 정원수로는 아래부터 여러 개로 갈라져 자라는 쟁반 모양의 반송이 있다. 수입 소나무인 리기다소나무도 흔히 볼 수 있다.

 

금강소나무는 백두대간 금강산에서 경북 영덕에 걸치는 산악지대에 주로 자라는 질 좋은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광화문·숭례문 등 우리 문화재 보수에 귀하게 쓰인다. 안타까움이라면 소나무가 우리 주변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온난화와 숲이 우거져 소나무의 햇빛을 가리는 것이 원인이다. ‘소나무 에이즈라는 재선충이 창궐하며 소나무가 일순간에 없어져버리는 재앙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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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

 

오대산 월정사의 명물은 전나무다. 특히 겨울철 풍경이 좋다.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푸르른 기상을 뿜어내며 추위와 맞서고 있다. 직선으로 쭉쭉 뻗은 1700여 그루가 지나온 세월의 흔적을 고이 품고 숲을 이룬다. 월정사 전나무는 고려 말 나옹 선사가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홍도의 월정사 그림에도 절 주위는 온통 전나무다.

 

전나무는 무리를 이루어 자라기를 좋아한다. 조선 숙종 39(1713) 부교리(副校理·홍문관의 종5품 관직) 홍치중은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고 임금님께 이렇게 보고한다. ‘무산에서 어활강(두만강의 지류)을 건너서 산 밑에 이르니 인가 하나 없는 넓은 땅이 나타났습니다. 백두산과 어활강의 중간에는 전나무가 하늘을 가리어 해를 분간할 수 없는 숲이 거의 3백리에 달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수해(樹海)를 가리킨다.

 

이처럼 전나무는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백두산 일대에서 잎갈나무·가문비나무와 함께 원시림을 이루어낸다.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높아 중부지방을 거쳐 남쪽으로도 거의 한반도 끝까지 내려온다. 금강산 장안사를 비롯하여 전북 부안 내소사, 경북 청도 운문사 등 이름 있는 큰 절에서는 흔히 전나무를 만나게 된다.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경기도 양주 회암사는 전나무와 깊은 관계가 있는 절이다. 회암(檜巖)이란 전나무와 바위란 뜻이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회암사는 주위에 전나무가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남으로 조금 내려오면 광릉이고 오늘날도 아름드리 전나무 숲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역사와 문화가 서려 있는 전나무 고목으로는 경남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천연기념물 제541)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지며 키 30m, 둘레가 네 아름에 이른다. 선생의 원래 나무는 죽어버리고 다시 심은 것이며 나이는 250년이 조금 넘었다. 전북 진안 천황사에도 비슷한 크기의 전나무가 천연기념물 제495호로 지정돼 있다.

 

전나무를 주로 사찰 근처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건물을 고쳐 지을 때 기둥으로 쓰기 위해서 일부러 심은 까닭이다. 전나무는 무리를 이루다 보니 빨리 키를 키워야 하므로 한가하게 구불구불 자랄 여유가 없다. 그래서 전나무는 모두 곧은 줄기를 만든다. 재질이 조금 무른 것이 단점이지만 사찰이나 관공서의 웅장한 건축물의 높은 기둥으로 쓰기에 전나무만 한 나무가 없다. 실제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보관 건물인 수다라장, 양산 통도사, 강진 무위사의 대웅전 기둥 일부가 전나무로 만들어졌다.

 

전나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에도 쓰임새가 넓다. 한 해가 저물어 가면서 곳곳에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는 전나무가 원조다. 마르틴 루터 목사는 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어느 맑은 밤, 상록수 숲을 걸으면서 별빛에 비춰지는 숲의 아름다움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가족들에게 그때의 느낌을 이야기하고 집 안으로 전나무를 가져와 하늘의 별처럼 촛불로 장식했다는 것이다.

 

또 전나무는 고급 종이 원료로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다. 목재의 속살은 대체로 황백색에 가까우나, 옛사람들이 백목(白木)’이란 별칭을 붙일 정도로 거의 하얗다. 거기다 세포 하나하나의 길이가 다른 나무보다 훨씬 길다. 따라서 종이를 만들 때 탈색제를 조금만 넣어도 하얀 종이를 얻을 수 있고, 긴 세포는 종이를 더욱 질기게 한다. 전나무 종류로는 분비나무와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구상나무가 있다. 남부지방에는 일본에서 가져다 심은 일본전나무가 자란다.

 

/증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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